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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철학과제)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성찰, 생태적 삶과 철학

Tonymory 2025. 1. 15. 16:36

1.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성찰

현대 사회에서 정치는 자주 민감하고 불편한 대화 주제로 비쳐진다.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정치 역사에 대한 부재와 현대 사회 정치의 난점들이 만들어낸다. 정치의 근원인 고대 그리스 아테네 정치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정치의 필요성을 깨닫고, 현대 사회의 정치가 가진 어려운 점과 문제점을 더욱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우선 정치라는 것은 무엇일까? 영어의 정치 “Politics”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높은 도시를 중심으로 방벽을 치고 세워진 도시인 폴리스(polis)에서 도시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활동이나 학문을 의미하는 폴리티케(politike)에서 따온 말이다. 즉 개인이 포함된 공동체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3가지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세 가지는 관조의 학문, 생산적 학문, 실천적 학문으로 나누었고, 이 중 실천적 학문은 정치학 등이 이에 속하며 고귀하고도 탁월한 행위와 시민(혹은 시민 공동체)의 공적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즉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부터 정치를 중요한 삶의 요소로 여겼다.

정치는 통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는 국가를 잘 운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지배층들이 자신을 이익을 위해 다수의 피지배층들을 제한하고 통치하면서 국가를 위한 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이는 통치일 뿐 좋은 정치라고 말할 수 없다. 통치(government)는 구성원들 간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배자와 피지배차들의 관계로 공동체가 형성되고 지배층은 피지배층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어야한다. 우월성의 기준은 근거가 무엇이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포함된다.

국경이 명확해진 이후의 근대사회에서는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정된 인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효율적인 국가 발전을 위해 위해 국가는 개인의 영역을 무시한 채 단순한 인구의 부분으로서 통치했다. 반면 그리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는 통치라는 관점에서 국가를 운영하지 않았다. 구성원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한 정치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다. 폴리스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상대방에게 지배자의 권력을 행사하도록 용납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자유시민 모두가 정치적 권력을 나누어 가졌고 누구도 독점할 수 없었다. 권력은 폭력이 아닌 토의와 설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어떻게 통치가 아닌 정치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을까? 아테네의 최초의 정치체제는 귀족정이었고 평민들의 권익은 지켜지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기원전 8세기 경 극심한 굶주림과 귀족들의 빚으로 어려움이 쌓였고 이는 공동체 자체가 해체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위기는 6세기 솔론(Solon)의 개혁으로 해소되었다. 솔론의 개혁은 빚에 물려 평민 신분을 잃은 농민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귀족과 자유인으로 만들었고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귀족의 일방적인 지배를 막았다. 또한 평민과 귀족을 나누던 제도를 없앴고 재산에 따라 계급을 나눠 권리와 의무 부과함을 통해 평민은 귀족의 차별을 줄이고 귀족의 지배권력을 약화시켰다. 솔론의 개혁이 곧 민주주의를 의미하기는 어렵지만, 개혁을 통해 평등이라는 정치적 원칙이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아테네의 정치 활동의 공간으로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아고라(Agora) 프닉스(Pnyx)의 세가지 광장 유적지가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종교적 신성성과 아테네 국력의 과시를 위한 기념적 장소였다. 초기에는 군사적 장소로서 외적 칩입이 있을 때 아크로폴리스로 피신하여 농성을 벌였다. 후대에는 종교적 의미가 강조된 신전의 집합소가 되었다. 아고라는 그리스인들의 모임 장소였다. 장사도 하고 기예를 뽐냈다. 즉 토론의 장이 되던 곳이었다. 프닉스는 시민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는 곳으로 정치, 군사, 종교적 사안에 대해 토론하고 투표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공적 삶이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에게 공적인 것은 국가나 공동체를 위한 일만 포함되지 않았다. 가정을 벗어나 개인의 행동이 드러나는 곳의 행위가 모두 공적인 공간였으며, 공적 장소는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한다는 규범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이라는 의미가 공동의 사적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공동체 혹은 공동의 이익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공적 행위를 참여하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생각했다. 영어 바보의 뜻을 가진 idiot는 정치적 참여를 거부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이디오테스(idiotes)로 유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litikon)’이라고 말하였고, 아테네인들에게 정치적 삶은 한정적인 수명의 인간의 삶과 생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삶으로 인지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공적 영역에서 타인들과 각자의 예술과 철학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적 행위의 탁월성을 인정받기 위해 경합했다. 이는 갈등을 빚어내기도 하였지만, 갈등은 각자의 시야를 넓혀주고 대립을 통해 더욱 견고한 자신의 공정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공적 장소는 자신의 공적 행위를 증명받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리스 정치과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비교하여 어떤 문제를 도출할 수 있을까? 현대의 민주주의는 고대 민주주의와 달리 대의제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국민의 투표를 기반으로 대표가 선출되지만 대표자들이 되는 이들은 사회적 엘리트들이 주로 이뤄지게 된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세력이 정치적 세력을 가지게 된 이후에는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을 키우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정치적인 결정이 심판되는 의회는 다수의 대표자들의 의견을 통해 결정되기 때문에 아무리 논리적인 토론과 의견을 펼친다 한들 지지자들이 없으면 투표는 자신의 세력에게 가기 마련이다. 소수 세력은 박탈감과 무력감에 의회 밖에서 표현해도 합법적으로 탄압되기 쉽다. 독점적인 세력의 행패는 점차 새로운 세력의 출현이 줄어들고 통치와 다를 것 없는 정치가 이뤄진다. 현대 사회의 정치적 발언이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정치적 행위는 인간의 삶을 살기위한 필수적인 행위였고 이는 의미있고 즐겨운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의 사회에서는 정치의 참여를 단순히 희생적이고 무의미한 부정적인 일로 여겨지는 현상이 있다. 근본적인 정치의 의미는 나를 포함한 공동체가 생계를 지켜내고 타인의 이기적인 억압으로부터 표현하고 벗어나는 행위였지만, 개인자체의 의미가 옅어지고 사회적 지위가 개인보다 높아지면서 세력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인식되면서 정치적 표현도 무의미한 행위한 불평으로만 여겨진다. 현대의 국가의 정치는 집단적 생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발생하는 대립을 조정하는 제도적 기능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현대인에게 정치는 공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계와 이익을 위한 행위의 장소로 여겨진다. 이러한 정치는 공동체 속에서 가치있는 개인을 재탄생 시키는 것이 아닌 대립만 고조시킨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현대와 비교하면 노예와 여성, 약소국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면서 정치를 지탱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근본적인 정치의 발전은 평등한 대우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울 수 있다. 현대 사회는 평등 자체의 의미보다 효율적인 결과가 더욱 인정받는다. 이는 다수의 생계를 빠르게 나아지게 만들낼 수 있을지언정 생계의 한계를 넘은 궁극적인 인간의 삶이라는 행복에는 멀어진다. 물질적인 것이 점점 행복의 지표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풍족해지지만 실제 많은 사람의 삶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진정 행복한 사회와 인간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이익과 다수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표현을 존중하고 타인의 의견을 귀기울이고 깊은 사고로 자신의 의견을 다듬고 토론하여 공동체의 행복을 기반한 자아를 실현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2. 생태적 삶과 철학

사회의 과학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현대인들은 누리고 있다.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이유로 자본주의를 통한 효율적인 노동과 발전이다. 1990년대 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가 가장 성공적인 사회 체제라는 것을 증명했고 과학기술을 발달로 더 많은 소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온전히 성공적인 사회체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경쟁을 기반으로하는 자본주의는 효율적으로 노동력과 사회를 이끌었지만 그 경쟁 속에서 공동체의 삶보다는 집단의 이익이 우선시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자연을 배제시키고 파괴시켰다. 경쟁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과도한 경쟁은 생태를 파괴시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생태는 무엇일까? 과거 1980년대까지 우리는 자연보호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은 자연은 인간에 의해 보호될 수 있으며 인간이 자연을 이용대상으로 보는 관점이었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자연대신 환경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단어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개념 대신 생태(ecology)라는 개념이 널리 사용된다. 생태는 생물종이 살아가는 상태와 체계를 의미하며 인간이 자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동등하고 상호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현재 인류는 생태적 위기에 놓여있다. 생태의 위기는 자연의 오염이나 자원을 고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위기, 문화의 위기, 인간의 위기, 의식의 위기 등을 모두 포함한다. 자연보호가 문화나 문명과 동떨어진 의미의 자연을 염두한 표현이라면 생태적 관심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하나의 차원에서 고려하는 관점이다. 자연의 관점에서 인간의 문화는 자연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 허나 인간은 삶에서 문화가 배제된 상태에서 생태 보호를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다양한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사고하는 것이 생태 보존의 목적이다.

생태 보존을 위해서 일차원적으로 물질적 오염을 생각된다. 물질적 오염은 우리 행동의 결과이지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의식 오염이다. 예를 들어 폐수를 강에 버리는 것은 누구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먼저 버리기 시작한다면 많은 사람이 똑같은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자신과 아무 연고 없는 독자적인 자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 타인과 사회에 영향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문화가 인간의 의식을 오염시키는 대표적인 원인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물신주의이다. 물신주의는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심화되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을 긍정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경제체제이다. 이기심으로 인한 과도한 경쟁은 이익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사소하고 불필요한 것이 된다. 또한 사회는 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물질에 대한 환상과 한계없는 욕망을 일으킨다. 이기적인 사회는 공동체 의식 없이 살게 만들고 개인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삶의 태도로 일반화한다. 현대 사회의 문제 해결 방식은 과학 기술에 의존한다. 이는 자연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는 곧 과학기술을 맹신하게 만들었고 오남용을 염려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실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공동체 의식을 왜곡시켜 자연을 배제시킨 삶이 당연해지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인류 역사에서 진보에는 합리적 사유의 발전이 등장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 중심적 사유에 균열을 초래했고 이는 자연을 객관적 탐구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켰다. 16~17세기 과학혁명은 인간의 감각과 자연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었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를 중요성을 강조했다. 데카르트는 인간 존재의 확실성과 인식을 기초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의 철학은 물질의 속성은 연장이고 정신의 속성은 사유라고 보아 인식 주체인 인간과 자연이 지닌 존재의 본질을 별도로 간주했다. 이런 합리적인 사유의 발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출현을 이끌었고 자원이용과 개인의 이익 효용을 극대화했다. 합리적 사유는 인류의 풍요와 과학 기술을 발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개인과 자연의 삶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공동체보다 집단의 이익이 우선되고 과학 기술 또한 공동체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닌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발전되도록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경쟁의 기반의 경제체제라는 점이 생태계에 위협이 된다. 과도한 경쟁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이 쉽게 경시된다. 대표적으로 아마존의 산림파괴와 석유 확보 경쟁을 예로 들 수 있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기술개발 역시 생태계에 위협이 된다. 화석연료의 사용은 이전에 겪지 못했던 새로운 공기 오염이라는 환경 문제를 만들었다. 원자력 또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부작용을 일으키고 이는 환경 파괴를 가속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중심 경제체제라는 점에서도 생태 파괴를 가속시키는 요인이 된다. 기업은 이익을 위해 수요와 관계없이 경쟁을 시도하고 생산을 쉽게 증가시킨다. 재화의 낭비와 부족의 피해는 공급자가 아닌 생태의 파괴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즉 경제적 이익은 생태계를 위협하는 데 가속이 되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생태계를 위협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은 체제나 시스템에 있다고 해도 그 해결책은역시 인간에게 달려있다. 많은 생태주의자들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로 보는 동서양의 고대 사상이 주는 교훈에 주목한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지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몽상적인 사고로 그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생태계를 위한 실천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선 자연과 생태에 대한 건강하고 균형잡힌 시선을 통해 행동에 따른 이익만 고려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이익 모두를 고려하여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삶을 지향해야한다. 또한 생태와 자연을 고려할 때 먼 생명이 아닌 내 주위에 생명부터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실천적 태도가 중요하다.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해야하지만 인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내 주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공동체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지해야한다. 그리고 삶의 규모를 소박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무한한 욕심과 허상에 대해 인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물질에 만족하고 소비의 즐거움보다 공존의 중요함을 높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